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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bby/電影

공자-춘추전국시대 역사적 배경은?

by 시앙라이 2010. 2. 17.

이번 설연휴에 공자 -춘추전국시대《孔子》영화를 봤다.

전체적인 내용도 보질 않고 어떤 스토리로 전개될까라는 나름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관을 나섰는데..

공자 - 춘추전국시대
감독 호 메이 (2010 / 중국)
출연 주윤발, 주신, 진건빈, 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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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를 보기전에 어느정도에 역사적 지식없이 그냥본다면 지루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적벽대전과 같은 큰 스케일의 전쟁장면은 별로 없고, 계도적인 내용이 깔려있어

 췟~이게 뭐야..? 할지도 모른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어땠을까?

공자(孔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해당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주왕조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제후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정치를 하였으며 그 제후국 내에 국정을 관리했던 경대부(卿大夫) 및 말단 관리와
군관(軍官) 계급인 사()는 전부 세습했으며 모든 것이 정해진 예법(禮法)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게 공자 시대에는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바꿔 말하면 예법(禮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공자 시대에는 그 예법(禮法)을 벗어나는 정도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상류 계층이 서로 정벌하고 공격할 경우 그래도 명의상으로는 도덕(道德)을 기치로 내걸었다.
실제 내막이야 설령 다른데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격한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하극상을 극치인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는 각국 세력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 시대의 전쟁은 전국민에게 파급될 정도로 처참하고 치열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쟁을 인해 자식이 부모를 잃거나 형제자매가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인간비극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전쟁 중 자주 등장하는 거전(車戰)이란 것은 일종의 귀족식 전쟁이라고 할만 하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전쟁 당사국 내지는 전쟁 당사자들은 피차간에 모두 서로 체육경기의 방식으로 전쟁을 진행했다.
말하자면 진
()을 치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고 서로 맞붙어 백병전이 붙었을 때도 모두가 공인하는 원칙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서도 일종의 예의(禮義)라는 것을 지켰다.
너무 몰인정하게 인정 사정없이 몰아 부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전쟁의 불문율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관계로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않았으며 적군의 장수를 직접 겨누어 화살을 쏘는 예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각종 술수를 사용하여 적을 속게 하여 승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미 적군에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혔다면 더 이상 찌르거나 베려고 하지 않았다
. 머리칼이 허연 군사는 설사 붙잡아도 포로로 삼지 않았다.
이런 춘추시대의 전쟁 모습은 유럽 중세기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열거한 이러한 원칙들이 반드시 지켜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참전 인원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전쟁을 치루는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단지 당시 사회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음을 표시하는 것일 뿐 전쟁 자체가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의 위력을 갖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공자
(孔子)로서는 당시 정세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잘 하면 잘 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
논어(論語)에 보이는 공자의 한적한 태도는 바로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맹자 시대의 난폭한 분위기와 비교해 보면 공자 당시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외쳤던 것이다. 자신의 탐욕, 개인적인 욕심...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예법(禮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사회가 잘만 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공자는 믿었음을 의미한다
.
물론 자신의 주장대로 잘 되지 않자 공자로서도 넋두리를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들을 듣지 않으니 아예 뗏목이나 타고 저 멀리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
혹은 봉황새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황하(黃河)에서 상서로운 계시가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나는 안되나 보다.
비록 이렇게 탄식도 하고 넋두리도 하지만 그러나 일단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구체적인 방침을 이야기할 때면 이른바 정명(正名)’이란 것을 당당하게 내놓기도 했다.
정명(正名)이란 명칭을 바르게 한다.

즉 삼라만상의 원래 이름 값으로 돌린다는 뜻. 무릇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신하는 신하의, 부모는 부모의, 자식은 자식의 응당 해야할 일만 하면,
그리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혼란스러워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일 나를 국정에 참여시킨다면 나는 동주(東周)의 태평성대를 만들지 않을까?이러며 옛적의 평화로운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중국현지에서는 아바타 상영을 중지하고
공자-춘추전국시대 영화를 범국가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이었는데, 그 만큼에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더 깊게 들어가자니 한참 길어질 것 같아 이번에는 배경까지만 하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