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한국대사관의 은희신 교육관의 말이다. 몇몇 학교의 경우 외국인 장학생의 90%가 한국인인 경우도 있다고 그는 전했다. 한국 유학생이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지적이다. 과거에 무계획적으로 중국을 찾는 유학생이 많았다면 이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 중국 유학에 도전하는 게 대세라는 얘기다. 그 구체적인 현장을 보자.
칭화(淸華)대 환경공학과에 다니는 허은(22.여)씨는 중국의 고속 성장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를 기회로 포착한 경우다. 허씨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중시하면서 중국에서는 이제 고속 성장에 따른 환경 파괴 방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며 "환경 문제를 다루는 중국의 연구소나 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베이징(北京)대 정부관리학원에 재학 중인 박정관(27)씨는 외환 딜러를 꿈꾼다. 그는 "제조업이나 무역만으로는 한국의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부한 뒤 금융 분야에서 미래를 개척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꿈인 안효진(21.여)씨는 베이징 중앙 미술학원 건축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영어 실력을 갖췄다. 안씨는 "세계 최대의 건축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중국에서 친구를 많이 사귄 뒤 앞으로 이곳을 무대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씨의 경우는 영어권 유학파까지 중국으로 가세하고 있는 흐름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해마다 중국을 찾는 한국인은 400만 명을 넘었고 중국에 상주하는 한국인도 70만 명을 넘어 내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면 재중국 한인 교민 100만 명 시대가 도래할 전망이다. 한.중 항공노선은 왕래 항공편이 매주 800여 회로 중국과 다른 국가를 연결하는 국제 노선 중 가장 많다.
베이징위옌(語言)대학에 유학 중인 이현영(21.여)씨는 이런 흐름을 포착하고 항공사 승무원의 꿈을 키워 가고 있다. 그는 "한.중 관계가 깊어질수록 인적 교류는 늘어날 것이고 항공 수요와 승무원 일자리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중국어를 배워 중국 노선에 취항하는 항공사에서 일할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일부 유학생 중에는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유흥가나 오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다수는 중국 유학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유학 생활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중국어의 벽을 넘어야 하고 외로움과도 싸워야 한다. 최근엔 부모 중 한 명이 아예 자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오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 올가을 베이징의대 본과 3학년으로 진급하는 최준호(20)씨는 어머니가 중국에 합류하면서 유학 생활의 안정을 찾고 성적도 크게 향상된 사례다. 그는 과천외국어고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비교적 일찍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2005년 9월 베이징의대 입학 이후 한동안 적응을 못 해 힘들어했다.
"예습까지 하고 해부학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수업시간 내내 교수님 말씀이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결국 첫 학기 해부학은 F학점을 받았고 성적도 반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었어요."
1년 후인 지난해 8월 최씨 가족은 서울에서 긴급 가족회의를 열어 어머니(김은숙씨)가 베이징으로 합류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최씨의 어머니는 단순히 밥 해 주고 빨래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다. 과천외국어고 어머니회 회장을 지낸 김씨는 베이징위옌대학에 등록해 아들과 함께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아들은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모자 간에 깊이 있는 대화도 가능했다.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은 최씨는 2학년 1학기 성적이 평균 20점이 오르며 중국 학생들을 제치고 반에서 5등까지 기록했다.
주중 한국인회 박제영 사무총장은 "지난해 중국 정부가 주관한 중국어 시험인 한어수평고시(HSK) 응시생 16만2000여 명 중 한국 응시생이 9만9000여 명으로 역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며 "중국인을 빼고 전 세계에서 중국어를 잘하는 인력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수준에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며 "신라 시대 당나라에 유학했던 최치원 선생처럼 중국인을 실력으로 압도할 '최치원의 후예들'을 앞으로 100만 명 이상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치원=경주 최씨의 시조다. 869년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한 뒤 5년 뒤 과거에 급제했다. 879년 당에 황소의 난이 발생했을 때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885년 신라로 귀국해 시독 겸 한림학사 등 벼슬을 맡았다. 관직을 내놓고서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중앙일보 2007.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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