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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중국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가 유명해진 까닭은?

by 시앙라이 2010. 1. 28.

양귀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귀비는 중국 미인의 대명사로 통한다.
양귀비가유명해진 것은 물론 그녀의 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중국 역사상 양귀비 말고는 미인이 없었단 말인가?
양귀비가 유명해진 것은 오히려 다음 두 가지 원인 때문인 것같다.

하나는 당현종(唐玄宗/ 재위 기간 713-756)과의 러브 스토리다.
또 하나는 대당제국의 몰락을 촉발시켰던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어쨌든 양귀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당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구실을 제공했다.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당나라는 몰락의 길목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양귀비가 중심점에 서있기 때문에 양귀비는 더욱 유명해진 것같다.



양귀비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장한가>

그렇긴 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 먼 과거의 어느 한 왕조가 미인 때문에 망했다고 하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양귀비를 기억할 것인가.
후세 사람들이 양귀비를 기억하는 것은 십중팔구 당현종과의 러브 스토리 때문이다.
이 러브 스토리는 당나라 때의 민중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라는 장편 서사시를 통해 너무도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 백거이 <장한가> 중에서


남자는 대당제국(大唐帝國)의 황제요, 여자는 역대 최고 미인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건이요, 그로 인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목졸려 죽었다는 것도 지극히 가슴 저리는 스토리다.
일국의 황제로서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두고 여생을 고통과 회한 속에 마감했다는 것도 범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는 설령 백거이의 <장한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조건이 구비된 셈이었다.
그러나 백거이는 기이한 환상과 풍부한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여 흔치 않은 러브 스토리를 더욱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표현해냈다.



<장한가>가 세상에 나오자 세상 사람들은 앞다투어 시 구절을 암송했으며 심지어 중국 이외의 한자 문화권조차 <장한가>의 원문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 당시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에서는 <장한가>를 곡에 맞춰 부를 줄 아는 하녀(下女)는 몸값이 두배였다는 야사(野史)의 기록도 보인다.
<장한가>를 지었던 백거이 본인 조차도 작품의 완성도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는지 자신의 시집을 편찬하면서 「<장한가>는 너무 멋져」를 연발했다고 하니까
그 자부심도 자부심이거니와 그 당시의 성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양귀비의 묘소)



참으로 엽기적인 러브 스토리

그런데 양귀비와 당현종의 러브 스토리만 나오면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중국역사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차렸던 시기를 가만히 따져보면 참으로 납득이 안가는 점이 있다. 그건, 당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달아나다 호위병들이 양귀비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 되었다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할 수 없이 양귀비를 교살(絞殺)시키게 했던 바, 당시 당현종은 71세 양귀비는 38세였다.


요즘처럼 성형술이며 화장품이 발달했다 해도 여자 나이 38세면 이른바 중년인데 백거이(白居易)의 묘사를 보면 '옥안(玉顔/옥같은 얼굴)'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타고난 미인이라면 그 나이에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71세의 노인과 그토록 로맨틱한 스토리를 엮어냈다는 것이 아무래도 백거이가 문학적으로 다소 과장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게다가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는 원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였다. 양귀비는 당현종의 친아들 이모(李瑁)의 왕세자비로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당현종의 눈에 들었다. 그렇다면 요즘으로 이야기해서 불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아래 사진은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



전통적인 역사가의 비평은 주로 이런 식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대당제국의 몰락 원인을 양귀비와 당현종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를 재껴놓은 채 사랑에 탐닉한 것은 그렇더라도 아무리 사랑한다고 그 일가친척까지 고관대작에 임명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는 문제였다.


그 당시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양귀비의 사촌오빠였는데 그는 시종일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 주장했다. 안록산의 반란은 양국충이 촉발시켰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당현종과 양귀비 일가가 사치스런 생활을 한 것도 사실은 사실이다. 정규 역사 기록에 보면 당현종은 매년 10월 화청궁(華淸宮)에서 겨울을 나곤 했는데 그때 양귀비를 비롯한 일가 친척들이 동행했다. 그들 일행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마구 버린 각종 보석과 비단 버선이 길 양편에 질펀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기를 기록했던 정규 역사책은 송나라 때 작성된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인데 아무래도 전대(前代)의 몰락을 비판하다보면 교훈적 역사관의 전통이 유구한 중국으로서는 위와 같이 도덕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공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러한 지적은 중국 역사의 흥망성쇠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간단명료한 맛이 있다.
누가 뭐라 해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사치스럽고 방만해서야 결국 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판단은 종종 문제를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작 역사의 복잡함과 진실성을 간과하는 수가 있다. 과연 궁중의 사치는 곧 부패의 상징이며
이는 곧바로 멸망으로 통하는가?


궁락도(宮樂圖). 당나라 말기 작품으로 추정. 궁녀들이 악기를 연습하는 장면. 전체적으로 보아 풍만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양귀비도 대략 이 정도의 몸매가 아니었을지.. 부유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도덕으로 재단하는 역사는 간단명료 하겠지만..

정규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8세기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長安)은 확실히 요즘의 강남 분위기였다.
귀부인들이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틀어 올렸으며 심지어 눈가에는 아이섀도우를 했다.
또한 여성들도 말을 달리며 공을 차는 소위 폴로(polo) 게임까지즐겼으며 실내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절 때면 수천명의 궁녀들이 줄다리기를 하며 즐거워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명대 청대의 전성시기보다도 훨씬 현대적이며 인간답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북방 기마 민족의 기염을 잠재웠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흥청망청 즐기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황제부터 하루 세끼 나물로 식사하고 궁녀들도 무명으로 몸을 감싸야만 한단 말인가?
모두가 초창기 거렁뱅이의 모습이 되어야만 멸망하지 않는단 말인가? 우리가 오늘날 과거 역사를 다룰 때 여전히 전통적인 도덕적 사관에 얽매인다면 굳이 역사를 논하고 말 것이없지 않겠는가.
사치하면 망하고 검소하면 흥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모든 게 간단명료하게 해결이 될테니까.
그렇다면 굳이 역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진다.
역사는 도덕가가 맡으면 된다. 무언가 간단명료하게 국가를 파탄시킨 일종의 희생양을 찾아내야 하므로 도덕과 윤리를 내세우며 상황을 악화시킨 장본인에게 간신(奸臣)의 레벨을 붙이게 된다. 중국 역사를 보면 어제는 간신이었다 오늘은 충신이 되는 예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안록산이 밀고 내려왔을 때 국가 창고에는 각종 재화(財貨)가 산적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화는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울러 민간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들의 도시 문화만을 살찌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창기 국고가 충실했다 해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수거하여 분배할 수 있는 조직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국가에 득이 될 수 없었다.
수도 장안의 화려함이나 왕실 및 귀족들의 사치가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국고를 투자할 수 있는 조직이나 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소규모 자경농을 세수(稅收) 기반으로 하는 관료 조직은 이처럼 어느 정도 경제 규모가 커지고 서로 다른 이익 집단간의 충돌이 생길 때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 역사가들이 모든게 도덕적 해이라고 돌렸던 문제의 이면에는 실제로 보다 엄중한 다른 문제가 곪아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현종 치세 기간에 이미 제도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일단 외형적인 면에서 볼 때도 당나라의 호구 수는 7세기 중엽 300여만 호가 등록되었던 것이 8세기 중엽에는 960만 호로 폭증했다.
얼마나 정확하게 통계가 잡혔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최소한 당나라는 인구 증가에 걸맞는 농업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
균전제(均田制)는 모든 농민에게 일정량의 농경지를 분배하고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제도였다.
인구는 태평성대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그러나 농경지의 증가는 그에 따라 증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에 따라 농경지를 분배받지 못하여 유동인구가 늘어나게 되었고 유동인구는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기본적으로 소규모 자경농 기반으로 세금을 거둬 국고를 운영했으며 관료 조직도 그에 맞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업이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응당 갖추어야 할 사유재산의 개념, 상거래 분규를 조정할 각종 법률이 갖추어질 겨를이 없었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수로(水路) 교통이 상업을 진작시킬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수도 장안으로 공납되는 지방 특산물이 선박 운송시 습기가 차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이 적지만 가격이 비싼 귀중품 위주로 결정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수도 장안으로 들어오는 물품은 거의 대부분 비싼 소비재로서 국고를 충실히 하기 보다는 궁중의 사치를 조장할 뿐이었다


이처럼 전체적인 인구가 증가하고 유동 인구의 출로가 막혔지만 중앙 정부는 행정적인 면에서 여전히 농업 기반의 관료기구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지역적 사무를 원활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지방 세력들이 자신의 영역에 맞는 제도를 스스로 모색하며 자치력을 강화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해 제어력을 점차 상실하게 된다. 중앙과 지방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 국경 주둔 사령관의 한명--절도사(節度使)라 부름--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지방 군벌이 중앙정부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대당제국이 이미 전국을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당현종이 아무리 미련해도 그래도 대당제국의 황제로서 40여년을 버티었는데 어떻게 변방의 절도사 하나쯤을 요리하지 못했을까? 사정을 알고 보면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안록산은 어떤 친구?

안록산은 국경지대인 지금의 열하(熱河)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말하자면 순수 중국혈통이 아니라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섞였다는 뜻이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대당제국의 건립자 이세민(李世民) 자신이 혼혈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민족 혈통이라 해서 차별대우하는 풍토가 별로 없었다. 안록산은 초창기 국경지대에서 이민족 사이의 교역에서 통역을 했었다. 그후 국경 수비대의 잡역부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워낙에 눈치가 빠르고 수완이 좋았기에 상사의 인정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각지를 순시하던 고위관리의 눈에 들어 황제에게 보고되고 황제는 743년 친히 접견하게 된다.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국경 수비대 사령관--절도사--을 하사했으며 결국은 세곳의 절도사를 겸하며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하게 되었다.


일이 이쯤에 이르면 당현종이 안록산에게 너무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8세기 초 북방 기마민족의 근거지 초원지대는 호전적인 부락들이 서서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당나라가 당현종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기로 접어들 무렵 초원 지대의 부락들은 점차 통일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농경문화에 집착하고 수상 교통에 매진한다는 것은 유목민족에게는 숨통을 열어주는 셈이었다. 당나라는 중반기로 접어들수록 북방정책에서 대체로 피동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규모 섬멸전은 더더욱 없었다. 당현종의 통치 기간 동안 국경지대는 50만 가까운 병력에 약 8만필의 말이 배치되어 있었다. 후방에서 보급되는 물자도 넉넉한 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동성이 뛰어난 북방 기마민족의 기병들을 대적하기에는 버거웠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무렵 동북방 국경선은 조선인과 거란인 그리고 돌궐 계열의 민족들이 뒤엉켜정세가 극히 유동적이었다.

각 지역의 사령관 격인 절도사들은 그 당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전면적인 통계에 근거하여 물자를 보급해주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필요한 물자를 휘하 군사들에게 조달토록 지시할 수 밖에 없었다. 방법은 당연히 인접한 이민족과 교섭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록산과 같은 인물은 이민족 언어에도 능통했고 또한 수완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입장에서는 국방을 위해서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군사 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전략은 해당 지역에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될 수 밖에 없기에 그 당시 상황에서는 중앙 관료조직이 감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록산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반란을 꾸밀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안록산의 난... 이건 군사조직과 문관조직의 대립

군사조직은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조직을 우선시 한다. 특히 당나라 중엽이후 북방 기마민족이 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국경선에 배치된 절도사들은 이점에 각별히 유의했다. 절도사는 수시로 변하는 변경의 위기 상황에 원할하게 대처하기 위해 그 권한에 있어 해당 관할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제후나 다름없었다. 절도사는 요즘으로 이야기해서 완비된 지방자치 체계하의 수장격이었다. 군대적 조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면에서는 매우 우수했다. 이에 비해 중앙의 관료 조직은 인의(仁義)와 도덕(道德) 원칙에 행정의 기준을 두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국부적인 희생을 당연시했다. 이런 관계로 행정의 효율성보다는 조직간의 화합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유사한 스타일을 유지토록 권장하는데 만족하지 어느 한 부문이 튀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러므로 절도사 체계와 문관 관료조직은 기본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안록산은 군사 조직의 대표이며, 당시 재상 양국충은 문관 관료조직의 대표였다. 안록산의 난은 양국충이 촉발시켰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그대로다. 따라서 안록산의 난은 문관 조직과 군사 조직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빚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나라 서주영(西州營) 명부- 부병제 및 둔전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

황제라고 어찌 이런 갈등과 충돌을 모를 리 있겠는가. 국방을 위해 절도사에게는 효율적인 군사적 조직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고 한편으로 소규모 자경농을 세수 기반으로 하는 문관 관료조직을 위해 두리뭉실한 인화(人和)적 조직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양국충이 등장하기 전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을 맡았을 당시 문인으로 하여금 절도사를 관할하는 방안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제 변경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던 자는 절도사였으므로 이런 방안 역시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두 조직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후진국일수록 이러한 충돌은 노골적이고 빈번하다. 문민 정부가 나왔다고 그렇게 떠들었던 우리 나라는 바로 군사조직과 문민 관료조직의 밀고 당겼던 그 역사를 곧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치사상적으로는 너무도 조숙하고 국가 통일 역시 너무도 빨랐던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방대한 인구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는 국정 운영의 원칙이 너무 간단했다. 그러므로 정작 인사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쌍방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원칙이 사전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이 극단으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어제는 혈육이었다가 오늘은 불구대천지원수가 된다거나 또는 부하가 상관을 죽이는 일이 먹이사슬처럼 불가사의할 정도로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처형의 방법이 극히 잔인한 것 등은 개인적인 원한도 원한이거니와 무엇보다 제도적 결함이 합리적 해결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조직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했기에..

군사 조직과 문관 관료조직이 여하히 조화를 이룰 것인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사 조직은 필요했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 문관 관료조직 역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 두 조직의 결합에는 실패했다. 당현종 당시 양자강 이남의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북방 국경선의 전력을 증강시키려던 계획은 이렇게 안록산의 난으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당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미국의 경우는 현재 어떠한가? 나토의 유고 공습 과정에서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이 있었다. 중국의 강대국 부상을 경고하는 미 군부의 고의적인 오폭으로 본다면 너무 비약인가? 클린턴 문관 관료조직이 그간 추진하던 대중국 유화 제스처에 큰 타격을 입히려는 군부의 장난이었다면 미국 역시 대당제국의 문제점을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조직의 문제, 체제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


당나라 세수(稅收)의 기본법이었던 균전제(均田制) 그리고 그뒤의 조용조(租庸調)와 부병제(府兵制) 등은 점차 유명무실해졌으며 현행 토지 소유자에게 세금을 물리는 양세(兩稅)라는 제도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전국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없었고 단순히 중앙정부가 액수를 각 지역에 분배하면 지방관리들이 자체적으로 세액을 조정하여 주민들에게 분납하도록 했을 따름이다. 결국 중앙정부를 등에 업고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일 뿐 국가의 권한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른바 세금이란것도 각 지역의 물품을 진상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점차 지방 자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각지의 군벌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형국이 이후 150년간 지속되었다. 결국에는 황소(黃巢)가 불만 민중들을 규합하여 당나라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화려했던 대당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양귀비가 죽일 년인가?

결국 대당제국의 몰락은 양귀비가 비록 도화선이 되었지만 실은 기술적인 결함이 주된 윈인이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결함은 중국이 근대화되기 이전까지 줄곧 문제가 되곤 했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도덕적 기준으로만 풀기에는 실로 복잡하다. 그래서 공자도 실패했던 것이다.